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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용우(林容雨) 고종 21년(1884) ~1919

 

독립운동가. 김포시 월곶면 개곡리(開谷里) 출생.

1919년 3월 29일 최복석(崔復錫)·윤영규(尹寧圭) 등과 함께 월곶면 길산리·조강리 일대에서 전개된 독립시위운동을 주동하였다. 외딴섬인 부천군 덕적면 진리에 은거하여 사립인 명덕학교(明德學校)를 설립하고 교사로서 2세 교육과 주민들에게 민족정신을 고취하는 일에 주력하였다.

 

1919년 2월 하순 경 청도교측의 연락을 받고 상경하여 3월 1일 서울에서 전개된 3·1운동 독립선언식에 참가하였다. 3월 29일 정오경 갈산리에 시위 군중을 집결시켜 최복석이 만든 태극기를 앞에 내세워 독립만세행진을 벌이고 오후2시경에 군하리 향교와 공립보통학교 · 면사무소를 차례로 행진하며 시위를 벌였다.

 

또 4월9일 교사로 있던 명덕학교의 운동회를 덕적도 해안가에서 개최하여 면민과 학생 전원이 모인 가운데 독립선언식을 거행하고 이들 앞으로 나아가 이재관(李載寬)·차경창(車敬昌) 등과 독립만세를 고창하는 등 독립시위운동을 전개하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인천경찰서에 구금되었다가 5월 9일 경성지방법원에서 보안법위반혐의로 징역 1년6개월 형을 선고받고 서대문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던 중 일제의 가혹한 고문을 못이겨 옥중에서 순국하였다. 1947년 3월 1일 덕적도민과 문인 제자들이 위국충의를 기념하기 위하여 덕적도 중앙에 충절비를 세웠다. 1968년 대통령 표창이 추서되었다.

 

 

殉國烈士 林容雨 先生 功德碑

 

선생은 구 한 말인 1884년 9월 월곶면 개곡리에서 학사공(繼子楨子)의 17세 후손으로 태어나시어 통진의 창신학교 를 졸업 하고 교사로 3년간 봉직 하셨으며, 이후 교육시설이 불모지인 옹진군 덕적도에 사재를 출연하여 명덕학교를 설립하시어 8년간 봉직하셨다. 선생은 일제에 항거하며 민족 해방을 노심초사 계책하시다 1919년 3월 1일 서울 파고다 공원 독립선언식에 지역 대표로 참가한 후 김포시 월곶면 등지에서 시민들과 같이 독립만세를 시창하고 시위행진을 주도 하시며 일본에 저항하셨다. 그해 5월 일본군에 검거되어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 되었으며 모진 고문 끝에 35세를 일기로 옥사 하셨다.

 

현재 서대문 형무소 순국선열 현충사 내에 위패가 봉안되어 있으며 1991년 8월 15일에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 되었다. 이에 우리 김포 종중에서는 선생의 높은 교육정신 과 애국정신을 후대에 선양하기 위하여 선생의 공덕비 를 세워 드립니다.

 

비문: 순국열사 임용우선생 공덕비 건립추진 위원장 임종훈

2016년 11월 09일

扶安林氏 密直公派 宗中會長 林鍾鎬外 會員一同

 

 

순국열사 임용우선생 공덕비 제막식

    

임철모(林哲摸) 고종 20년(1883) ~1919

 

독립운동가. 본관은 부안(扶安), 김포시 대곶면 초원지리 출생.

자는 중협(仲挾). 통정대부(通政大夫) 승필(承弼)의 자. 25세까지 한학을 수학하였는데 구한말에 구래리(九來里)에 소재한 분남학교(汾南學敎)를 졸업하고 참봉직을 수임하였다.

 

1919년 3월 23일 양촌면 양곡리에서 장날을 이용하여 서당의 교사인 정인섭(丁寅燮), 이효원(李孝元) 등과 협의하여 독립시위운동을 주동하였다. 이날 오후 4시경 3백여명의 시위대의 선두에 서서 전날 정인섭이 제작한 태극기를 휘두르며 앞에 서서 독립만세를 고창하면서 시위대를 경찰주재소와 면사무소로 이끌고 가려하다가 이를 제지하던 일본 경찰에게 태극기를 압수당하고 체포되었다. 이날 시위의 영향으로 김포시 전역에 독립시위운동을 촉발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 사건으로 같은 해 6월 2일 경성복심법원에서 보안법위반혐의로 징역 8개월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르면서도 다른 수인들을 규합하여 감옥에서 독립만세를 외치는 독립의지를 보였으나 일제의 극심한 고문 끝에 옥중에서 순국하였다.

 

1963년 대통령 표창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