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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공 사적 약초

승정 기원 후  14세손 해사 승익

번역 17대손      문기

 

공의 성은 임씨(林氏)이고 휘자는 계정(繼楨)이시다. 처음 관향은 평택(平澤)이었는데 뒤에 부안(扶安)에 봉읍을 받았으므로 이에 부안을 관향으로 삼았다. 시조의 휘자는 팔급(八及)이신데 신라 경순왕 때 벼슬하셨다. 전쟁에 공이 있어 금성군(錦城君)에 봉해지시고 시호는 충절(忠節)이시며 이로부터 관직이 계속 이어져 왔다.

여러 번 전하여 봉익대부이신 시호는 절의(節義)이시고 휘자는 춘(椿)이시고 호는 서하(西河)이신 분은 성리학과 문장에서 이전의 현인들이 미처 드러내지 못한 것을 펼쳐 보이셨으며 문집이 2권 세상에 전한다. 예천의 낙안서원과 공주의 서원에서 제사를 모시는데 이 분이 공의 5대조이시다.

 

증조의 휘자는 숙(淑)이신데 영상좌리공신금자광톡대부수상주국보안백이시고, 조는 휘자가 대광(大光)이신데 추성익위공신대광보안군이시고 부친은 휘 득성(得成)이신데 중훈대부사재감정이시다.

  

공은 태어나면서부터 기이한 자질이 있어 어려서부터 뛰어났다. 하늘에서 받은 품성이 높고 명철했으며 성품과 법도가 굳세었다. 학식이 점점 나아지자 가정(稼亭) 이곡(李穀)선생과 목은(牧隱) 이색(李穡)선생과 양촌(陽村) 권근(權近)선생 등을 따라 배우면서 격물치지의 공부를 익히고 연원의 올바름을 소급하여 탐구하니 크게 당시 사림의 모범이 되었다. 늦게 과거에 급제하여 여러 관직을 지내다가 한림학사가 되었다. 조정에서 일을 맡을 때는 임금에 충성하고 나라를 걱정하는 마음뿐이었으니 곧 이것은 하늘로부터 받은 품성이요 또한 가훈이기도 했다.

대대로 임금의 교시를 관장하는 나머지에 예문관에서 뜻을 높이 폈으며 승명전에 출입하면서 영예롭게 드러남이 비록 지극했으나 본디 성품이 맑고 깨끗하여 스스로를 감춤에 힘쓰고 겸양의 풍도를 깊이 간직하고 명예와 이익의 길을 멀리 피하였으므로 평생의 기이한 절개와 탁월한 행적을 세상 사람들이 거의 듣지 못했다. 임견미가 권력을 잡고 마음대로 일을 꾸미자 조정이 크게 시끄러워졌다. 공은 자취를 감추고 왕래하지 않으며 두문불출하고 고요히 거처하면서 서로 간섭하지 않았다.

 

공양왕이 홍무(洪武) 22(1389) 기사년에 즉위하였다. 다음해인 경오년(1390)에 주서 길재(吉再)가 관직을 버리고 선산에 은거하니 공도 또한 제학 민유주(閔愉),주옹(朱顒, 周顒이라고도 함) 등과 뜻이 같고 도가 합하여 함께 물러나 나루를 나누어서 거처하였으니 이 분들이 통진(通津)의 삼학사(三學士)이다.

우리 조선이 한양에 도읍을 정한 뒤에 공의 종조(從祖)이신 전서 휘 난수(蘭秀)께서 은퇴하여 공주 금강 위에 거처하시면서 그 정자를 ‘독락정(獨樂亭)’이라 하니 임금이 그 절의를 가상히 여겨 한 지역의 강산을 하사하여 포상함으로 후인들이 이에 그 땅에서 제사를 지냈다. 공의 가까운 친척인 임선미(林先味)는 조의생(曺義生),맹씨(孟氏) 등 여러 현인과 더불어 두문동에 은거하였으니 그 일이 나라의 역사에 실려 있다.

 

공이 나라의 훈벌이며 대대로 벼슬하던 집안으로서 벼슬길에 나아갈 생각이 없이 바닷가 모퉁이에 숨어 살면서 두문불출하여 한가로이 거처하면서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 절개를 지켰다. 오직 민유주, 주옹 등과 지팡이를 짚고 신발을 끌면서 서로 교유하며 날마다 시와 술로 스스로 즐겼다. 시에 말 하였다.

 

     가을이 오고 가을이 가는데 흥이 끝이 없네

     향기로운 벼와 살찐 물고기가 가는 곳마다 있도다

     배부른데 허리에 찬 술병에 흰 술 가득 담아

     남쪽 마을 늙은이가 북쪽 마을 늙은이를 만나네

 

밭가는 일과 독서, 충효로 자손을 가르쳤으며, 가문에 시와 예를 전하는 일과 맑고 소탈한 기풍이 떨어지지 않도록 경계하였다. 묘소를 마련함에도 풍수를 따지지 않고 오직 골육이 서로 모일 수 있는 곳을 점쳤을 뿐이다. 조석 생계의 자본으로는 나라에서 준 것은 먹지 않고 반드시 고려에서 받은 땅에서 얻은 것으로 공급하였는데 몸을 마칠 때까지 한결같았으니 백이 숙제가 수양산에서 고사리를 캤던 높은 풍모에 부끄럽지 않았다.

 

공경히 생각건대 우리 태조대왕이 그 절의를 가상히 여기고 학문을 소중히 여겨 여러 번 부르는 명령을 내려 특별히 장단교수를 제수하고 다시 안변부사로 임명하였다. 옥과 비단이 언덕에 휘황찬란하고 명패와 교지가 도로에 나부껴 포상하고 높이는 예를 다 함으로써 격려의 방편으로 삼았으니 국가의 바르고 큰 기운을 넓히고, 후생들이 앙모하는 정을 펼쳐 장차 천하의 후세에 신하된 자들 중에 두 마음을 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함이니 아아! 풍성하도다. 위대한 성인이 절의를 함양하고 풍교의 넓은 규모를 심는 원대한 계획이다. 그러나 공은 병환으로 사양하고 마침내 일어나지 않았다.

 

드디어 처음 관직에서 물러나는 날부터 연기와 노을에 의지했으니 이 어찌 두문불출하여 조정에 나아가지 않았던 여러 현인들과 비교할 수 있겠는 가? 인의를 얻은 지조가 사방을 놀라게 하니 완고한 자에게 염치를 알게 하고 나약한 자들을 우뚝 서게 하는 기풍이 만세의 사표가 될 만하다. 비루하고 인색한 자들이 그 교화에 감동하여 곱절로 충효를 생각하고 완고하고 우매한 무리들이 더욱 예의의 소중함을 흠모하게 되었으니 은연중에 술상에서 적의 예봉을 꺾는 것 같은 기상이다. 이것이 우리 임금께서 포상하여 장려하고 총애하여 불러 만세에 충의의 길을 열어 놓은 것이다. 공은 하사받은 땅에서 의리를 지키며 끝내 늙어 당시 세상에 소문이 나는 것을 구하지 않았다. 이때를 당하여 전서공은 공주에 물러나 은거하고 휘 선미는 두문동에 은거하였으니 한 가문에 충렬과 도덕이 이와 같이 탁월하였다.

  

태종조에 정몽주와 길재, 임난수 등 18인을 제사지냈으며, 세종조에 승국충신 임난수에게 불조지전을 내리고 사원에 편액을 하사하며 공을 새긴 패와 상급을 내리고 다시 관리에게 명하여 제사지내게 했다. 그러나 공은 홀로 포상하여 선양하는 자리에 참가하지 못했으니 나라 사람들이 억울해 할 뿐만이 아니라 오히려 길 가는 사람들도 탄식하게 되었다.

이것은 진실로 남은 후손과 한미한 족속이 타향 땅에 살면서 초야에 묻혀 선조의 천지처럼 높고 일월처럼 밝은 절의를 스스로의 힘으로 밝히고 드러내지 못했기 때문이니 어찌 탄식을 이길 수 있겠는가? 가히 지사와 영웅의 눈물을 천년의 뒤에도 떨어뜨리게 할 것이다. 이후에 후손들이 추모의 정성을 펼쳐 대략 명나라의 평화 이씨의 예대로 의리로써 시조 충렬공의 별도 사당을 창건하고 부안공과 문정공, 서하공, 학사공의 네 분을 배향하여 봄가을로 제사를 모시는 뜻을 가졌으나 지금까지도 이루지 못했으니 애통하고 한탄스럽도다. 그뒤로 임진란과 병자란을 지내면서 종가가 또 녹을 회수당하는 재앙이 생겨 선조의 문헌이 다 없어져 남은 것이 없게 되었다.

 

남해공이 널리 유적을 모아 소략하게나마 종파의 명맥과 연대를 서술했는데 공의 정충과 절의를 천지에 선양하여 밝히지 못하고 일월에 빛나게 하지 못했으니 후손들이 원망하고 사모하는 마음과 사림들이 결여됨을 슬퍼하는 회포가 오래되면 될수록 더욱 새로워졌다. 지금 세상을 당하여 조금씩 임금을 존중하고 어버이를 사랑할 줄 알며 예의와 염치를 가진 자들이 대부분 풍모를 듣고 감동을 일으켰으니, 세상을 돕고 사람의 기강을 세우는데 어찌 작겠는가.

지난 문서를 대략 살펴 실제사실을 삼가 기록하면서 조상을 사모하고 종족을 돈독하게 하는 일로 여긴다.

 

역사로 보는 휘 계정

18대손 임종상

 

휘는 계정이요 부안임씨 시조 휘계미로 부터 11세손이며 서하공의 5세손이다. 고려 공민왕 때 한림학사 이셨다. 고려 3은 중 목은 이색의 문하생 출신이다. 공께서는 포은 정몽주가 타살 당하고 목은 이색과 야은 길재가 낙향하며 고려가 망함에 공민왕 2년(1389년)에 개경에서 통진으로 터전을 옮겨 삼학사가 애도하였으니 그 삼학사의 한분이다. 임계정, 민유, 주사옹 의 세분이 동시에 자리를 잡은 곳이 통진이다.

역성 혁명 당시 기득권 세력의 절개를 고수 不事二君 의 마음으로 朝鮮에 합류하지 않으시고 통진에  隱居하시며 자손들에게 충효와 절개를 중시하고 면학에 힘쓰며 논밭이나 갈며 때를 기다리라는 교훈과 함께 교분 관계를 유지하며 은거하였다.  

삼학사가 주고 받은 아래와 같은 싯구가 있다.

 

   「 가을이 오고  가을이 가는데 」

 

   가을이 오고 가을이 가는데 흥이 끝이 없네

   향기로운 벼와 살찐 물고기가 곳 곳 마다 있도다.

   배부른데 허리에 찬 술병에 흰 술 가득 담아

   남쪽 마을 늙은이가 북쪽 마을 늙은이 만나러 가네

 

태조 이성계가 조선 개국의 세력에 동참시키고자 공에게 중훈대부행장서교수 겸 안변부사 벼슬을 제수하였으나 어명도 마다 하고 불사 하였다.

현재 공의 묘소 일원의 토지는 당시 제수 받은 토지로 공의 손은 공으로부터 20대 이상을 이어오며  이사한 일도 없고 절손된 일도 없으며, 공의 후손과 함께 영원하다고 믿고 있다.

시제는 매년 (음) 10월 10일이다.

 

통진 삼학사 시

 

임 계정 학사

  가을이 오고 가을이 가는데 흥이 끝이 없네

  향기로운 벼와 살찐 물고기가 곳곳마다 있도다

  배부른데 허리에 찬 술병에 흰 술 가득 담아

  남쪽 마을 늙은이가 북쪽 마을 늙은이를 만나네

 

민 유 학사

  가을이 오고 가을이 가니 즐거움이 끝이 없네

  닭이며 돼지와 뽕과 삼이 곳곳마다 같도다

  향기로운 벼 있는 집마다 새 술이 익으니

  낚시하는 늙은이가 고사리캐는 늙은이에게 권하네

 

주 사옹 학사

  가을이 오고 가을이 오니 한이 없도다

  머리 돌려 청산을 보니 베개가 나란하네

  오직 조강의 반달은

  세 늙은이 비추는 맑은 빛을 바꾸지 않네

 

학사공 휘계정 사적 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