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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임씨의 시조始祖 임팔급林八及

시조 동도 始祖 東渡

 

임팔급林八及이 당나라 문종때 나이 18세로 벼슬하였고  충직하여 한림학사翰林學士가 되었는데 군소간배群小奸輩들의 모함을 받고 동료 7학사와 함께 바다를 건너 동쪽으로 오시어 평택 팽성에 닻을 내리시었다. (복건성 팽성에서 출항)

신라에 출사하여 관직이 사부상서吏部尙書에 이르렀는데 때 마침 적병이 변방을 침입하므로 공公이 분연히 토벌하였다는 것이다.

 

서하문집에 의하면 당나라 명종 때를 동도시기로 하고 있다. 이시기는 서기 926년에서 933년에 이르는 기간으로 신라의 마지막 임금인 경순왕 때에 해당된다.

따라서 동도설로서 이상과 같이 주나라 무왕원년 동도설과 당말 동도설 중에서 당 문종 시 동도설과 후 당 명조 시 동도설이 있으나 이 세가지 설이 다함께 동방 임씨의 시조는 학사공 팔급으로 중국에서 우리나라로 동도하여 오셨다는 사실은 동일하며 모든 임씨의 족보와 기록이 일치함으로 동도 시기만을 생각해 보기로 한다.

 

첫째로 주나라 무왕 원년 동도설은 지금으로부터 약 3,100년전에 동래 했다고 하는바 우리 임씨가 동방에서 오랜 역사를 가진 씨족 이라는 데는 이의가 없겠으나 이론상에 문제가 생긴다. 즉 득성설에서 비간설과는 시기적으로 맞지 않다. 왜냐하면 이때에는 견이라는 분이 장림산에 은거하였던 시기임으로 동래한 시조가 견공이라면 몰라도 기자라면 이론상 합리화될 수 없다. 또한 족보에 온蘊을 始祖로 하는 경우가 있으나 먼저 언급한바와 같이 온이란 분은 당나라 중흥기 분이라는 것이다. 이것을 뒷받침 하는 것으로 서하문집 가운데 수록되어 있는 중추회음서에 [금년 추석 하루전날 이담지가 나에게 글을 보내어 하는 말이 내가 오늘 저녁에 술을 갖추어 밝은 달 아래 잔을 주고받으며 우리집 고사를 다시 닦아볼까 하는데 자네도 제남濟南(임온의 호)의 후손이 아니던가 어찌 옛 정을 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따라서 이담지가 서하공을 가리키며 자네도 제남의 후손이 아니였던가 한 것으로 보아 임온은 당나라 분이였으므로 주나라 무왕시 기자동래설은 타당치 못하다고 본다.

 

둘째는 당말 동도설 또는 후당 동도설 중 어느 것이 타당성이 있느냐 하는 문제는 서하공이 1137년에서 1171년대 분으로 선조 동도후 불과 2~300년 내에 후손의 말이 가장 신빙성이 있는 듯 하다. 따라서 당말 동도설 즉 당나라가 망하기 직전 850년대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으로 보인다. 이를 뒷받침할 수 있는 문헌으로는 8학사 중 설인경의 동도시에서??이씨는 당조의 운수가 다함이여! 현사들이 참소를 당하는 도다(仙李運衰兮賢士被讒)??라고 쓴 글귀로 보나 유전의 시에서??인조 즉 기자와 미자가 바다로 들어감이여! 은나라가 망했도다.(二祖入海兮 殷道衰亡)??라고 한 것 등으로 보아 당말 전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본다. 우리 문헌중 7현이 바다를 건너 팽성 용주방에 자리를 잡았다 라고 기록되어있고 그동안 연구조사결과 8학사들께서는 농성을 쌓고 상당기간 공동생활을 하다가 7학사들은 각자 삶의 터전을 찾아 떠나셨고 팔급공께서 만 남아 정착한 것으로 전하여지고 있다.

 

출처 : 임씨 상계 보감

 

임팔급, 8학사 동도시 林八及, 八學士 東渡詩

 

팔현이 바다를 건너 팽성 용주방에 자리를 잡았다 라고 기록되어있고 그동안 연구조사결과 팔학사들께서는 농성을 쌓고 상당기간 공동생활을 하다가 칠학사들은 각자 삶의 터전을 찾아 떠나셨고 팔급공께서만 남아 정착한 것으로 전하여지고 있다.

 

八學士東渡詩

林八及 : 入人浮海兮 桂棹蘭檣

薛仁敬 ; 仙李運衰兮 賢士被讒

許  董 : 吾徙東矣兮 可以免禍

劉  筌 : 二老入海兮 殷道衰亡

宋  奎 : 接淅而去兮 謝暗投明

崔  ? : 波濤?矣兮 舟楫利逝

權之奇 : 見機而作兮 疏廣之徒

孔德狩 : 賢士出東兮 竭誠盡忠

 

여덟 사람이 바다를 건넴 이여 계수나무 돛대와 난초의 삿대로다

이씨(당나라)의 운수가 다하였으니 현사들이 참소를 당하는 도다

우리들은 동으로 가니 가히 화를 면 하리 로다

이노(기자,미자)가 바다로 가니 은나라도 망 하더라

절강(淅江)에서 떠남이여 어두운 곳 버리고 밝은 곳 찾아 가네

파도가 넓음이여 뱃길을 편히 가누나

기미를 보아 행동하니 소광 같은 사람들이 로다

현사들이 동으로 가면 정성과 충성을 다 하리로다

 

팔급공 동도 연대와 동도에 관한 조사

八及公 東渡 年代와 東渡에 관한 調査

 

팔급(八及)公의 동도(東渡) 연대는 상계(上系) 정립(定立)에 중요한 요인으로서 지금 까지는 당나라 문종(文宗)조(827-840)이라는 설과 후당(後唐) 명종(明宗)조(926-933)라는 설이 있고 일반적으로는 서기 850년~900년 전후라고만 전해 오고 있다.

그러나 上系 연구 과정에서 논자(論者)가 조사 한 바에 의하면 서기 870년 전후가 타당하다고 본다. 그 논거(論據)로는

 

(1) 최근 한국 林氏 원류(源流)가 밝혀 저 득성(得姓) 林氏 80世 온공(蘊公)이 구목연파(九牧衍派) 제육방(第六房)의 시조로 당나라 정원(貞元) 4년(서기 788년)에 명경과(明經科)에 급제한 史料와 팔급공(八及公)의 종조부(從祖父)격인 동공(同公)이 821년 급제, 팔급공의 동항(同行)인 상청공(尙淸公)이 866년 급제(及第)등의 기록이 중국 자료에 명기되어 있으며 온공(蘊公)이 八及公의 고조부(高祖父)가 되므로 중국 자료를 종합하면 870년경이 추정된다.

 

(2) 양저공(良貯公)은 신라 경순왕(敬順王)(927-935)의 왕자 정현(貞顯)의 사위로서 재상된 행적에서 고려 건국이 918년 신라 멸망이 935년 당나라 멸망이 907년 후당(後唐)은 923-935년이 된 점으로 보아 위와 같이 추정 할 수 있다.

 

(3) 팔급공(八及公)은 당 덕종(德宗) 乙巳生이며 당년 18세에 등과 하여 한림학사를 역임하시다 간신들에 참소를 받아 七學士와 함께 동도 신라 신덕(神德) 왕 때 이부상서(吏部尙書)를 역임하였다는 사례(扶安林氏 先祖寶鑑 P 105)

 

(4) 비간문화(比干文化) 연구회(중국임씨 연구기관) 임수단(林樹丹) 종장(宗長)이 당나라 말경에 八及公이 바다 건너 신라에 간 후 1088년만에 임윤화(林允華)고문이 중국방문단을 인솔 조상의 뿌리도 찾고 조상의 유적을 참배한 일은 팔 민(八?)을 놀라게 했다는 자료 (팔민은 중국 하남성, 복건성, 대만에 사는 임 씨를 총칭)

 

(5) 팔급공 후손들이 사료(史料)에 나와 있는 사실을 연대로 역산했을 때 870년 전후가 타당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고려사에는 임언(林彦)을 927년 고려 태조 10년 당나라에 사신으로 보내고 임희(林禧)는 1045년 송나라 대상(大商)과 토산물을 교류 했다하고 임명필(林明弼)은 918년에 순군부령(巡軍部令)으로 임희(林曦)는 병부령(兵部令)으로 명했으며 그 외도 임적여(林積璵)는 광평시랑(廣評侍郞) 임상난(林湘煖)을 도항사향(都航司鄕)으로 임식(林寔)은 廣評郎中으로 하였다는 사료(史料)가 있다.

 

출 처 : 임씨 상계 보감

 

충절공 기념사업  忠節公 紀念事業

 

彭城근린公園造成

平澤市는 農城을 中心으로한 彭城근린公園計劃을 2000年에 確定하였고 2001년에는 공원부지 1만 2000평을 확보하였으며 2002년 4월부터는 公園造成工事를 착공하여 年末에 完工을 目標로 工事가 進行되고 있다.

公園內에는 各種 편의시설과 산책공간이 마련되어 있어 많은 사람들의 발길이 잦아져 觀光名所가 될 것이다.

 

忠節公 紀念物建立

全國林氏 中央會에서는 忠節公紀念事業推進委員會를 構成하였고 委員長에 林完洙氏, 幹事에 林貞喆氏로 委員會를 運營하고 있다.

委員會에서는 平澤市와 公園造成工事 관계를 수시로 협의하면서 忠節公의 世居地를 부각시키기 위하여 많은 노력을 하였다. 그 결과 平澤市에서는 公園內에 忠節公紀念物을 建立할 수 있도록 하여주었다.

委員會에서는 忠節公紀念物로 여러 가지를 論議하였으나 두가지 方案으로 압축되었다.

?첫째안은 忠節公 林八及遺墟碑이고

?둘째안은 忠節公 銅像建立으로 되어있어 今年 上半期까지는 確定하여 推進할 계획이다.

 

전국 임씨 중앙회 기념사업

 

농성 유적지 조사 보고서 農城遺蹟調査 報告書

 

-1998. 5. 15

-平澤市 水原大學校 博物館

※참고 : 上記 報告書는 평택시 팽성읍에 있는 農城이 林八及公과의 연관이 있는 것인지 학술조사를 평택시에서 水原大學校에 用役을 의뢰한 보고서이다.

 

1) 序文

이 보고서는 평택시가 수원대학에 학술용역을 발주한 것을 수원대학이 평택시 팽성읍 안정리 산二一의 二번지 등에 위치한 農城(京畿道指定紀念物 第七十四호)에 대한 유적조사를 완료하고 발행하는 유적조사보고서이다.

농성에 대한 유적조사와 보고서 발간에 필요한 모든 경비는 평택시에서 부담하였고 지표조사 결과 수집된 여러 자료들은 수원대학교 박물관에서 보관하고 있음을 밝혀둔다.

책임조사원 : 정일동(수원대 박물관장)외 五명

 

2) 문헌에 대한 검토

農城은 경기도 평택시 팽성읍 안정리에 위치하고 있으며 ??夷城재??라고도 불린다. 농성이 문화재로서의 가치를 인정받고 경기도 지정문화재가 된 것은 一九八一년 七월이다. 앞서 一九八0년 七월 인근부대에서 장교 및 하사관 주택을 건축하고자 임야훼손허가 처리과정에서 농성이 문화재로서의 가치가 있는지를 문화공보부에 조사 의뢰하였다. 그 결과 남아있는 토성의 보존상태가 양호하여 문화재로 지정된 것이다.

농성이 위치한 팽성의 연혁을 살펴보면, 팽성은 백제때 牙述縣 땅이었으며 후에 河八縣이 되었다. 그리고 신라 경덕왕 十六년(七五七) 湯井郡 領縣이 되었다. 팽성에는 白浪部曲이 있었다는 기록은 있으나 자세하지가 못해 한국사에서 부곡이 존재했던 삼국시대부터 조선초기 팽성에 부곡이 있었다는 사실만을 지적할 수밖에 없다.

평택이란 지명이 처음 사용된 것은 고려시대이다. 이때 河八縣이 평택으로 개칭되고 천안부 속현뒤에 監務를 두었다.

조선왕조가 건국되고 太宗 十三년(一四一三)에 현감을 두었으며 訓導 一명을 增置하였다. 연산군 十一년(一五0五)에 경기도로 이속되었다가 중종 원년(一五0六)에 다시 충청도로 환원되었다. 임진왜란 중인 선조 二十九년(一五九六) 왜의 침략으로 온 마을이 蕩殘되었기 때문에 현을 혁파하여 직산에 소속시켰다. 광해군 二년(一六一0)에 다시 縣으로 복구되었다.

한편 이 시기 지리지에 ??팽성(彭城)??이라는 지명이 처음 출현한다. 영조 三十三년(一七五七)에서 영조 四十一년(一七六五)사이에 전국 각 읍에서 편찬한 읍지를 成冊한 “輿地圖書”의 ??平澤縣??편에 ??古號彭城府邑誌無載只稱口傳??이라는 기사가 나타난다. 그리고 一七七0년에 편찬된 것으로 보이는 “彭城志”에 ??팽성이란 명칭은 오래 전하여 내려오기는 하나 傳記에 전혀 기록이 없어 어느 때에 이러한 이름으로 불리웠는지 알 수가 없다??라는 기사가 있다. 즉 팽성이라는 지명이 오래 전부터 전해오고 있는데 그 연원을 알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같은 “팽성지”에 ??대체 이 고장을 옛날의 彭城府가 후대에 河八縣이 되고 다시 평택으로 바뀌었다??라 하여 팽성이라는 지명이 河八縣보다 앞서 사용되었는데 광해군 二년(一六一0) 현으로 복구될 때 읍호를 팽성으로 하였다고 기재되어 있다. 같은 “팽성지”내에 서로 상이한 내용이 수록되어 있어 사료로서의 신빙성에 의문이 가나 金正浩의 “大東地誌” ??平澤??편에도 ??光海主二年復置(邑號)彭城??이라는 기사가 있어 대체로 임란직후부터 팽성은 공식 지명인 평택과 함께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농성의 축조시기와 용도에 대해 살펴보겠다. 여기에 대해서는 다양한 설이 있다.

첫째 삼국시대 축조설이다. 삼국시대에 도적이 심하여 양곡을 보관하기 위하여 쌓았다는 설과 神仙 道僧이 居址하기 위하여 쌓았다는 두가지 설이 전해오고 있다.

그러나 내용을 약간 달리하여 ??삼국이 서로 전쟁을 할 때 서로가 치고 받고 하는 까닭에 농민들은 해마다 가을 추수 때가 되면 곡식을 거두어 모아서 그(농성) 가운데에 감추어 쌓아 두었다??하여 도적이 아니라 각종 수탈로부터 양곡을 보호하기 위해 쌓았다는 설과 ??신령스럽다는 중 道仙이 地脈을 가라앉히기 위하여 이 성을 쌓았다??는 설도 제기되고 있다.

한편 성의 축조를 앞에서 살펴본 백랑부곡과 연결지어 해석하는 설도 있다. “輿地圖書” ??平澤縣??편에 ??白浪部曲載在輿志今無可考而縣西三離許有土城疑或指此也??라 하여 농성이 백랑부곡민의 집단거주지였을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둘째 고려시대 축성설이다. 농성이 토성인 점을 주목하여 조선시대 성은 대체로 석성이고 읍성을 제외하고는 산을 의지한 天然要塞地에 축성하는 경우가 많아 조선시대 축조 가능성은 희박한 반면 고려시대 성은 대체로 토성이고 규모도 작다. 더욱이 농성은 인접해 있는 고려시대 토성인 처인성과 축성방법 및 입지조건이 유사하다. 고려 후기에 잦은 왜구의 출몰에 대비하여 전국에 많은 성을 축조하였는데 왜구의 출몰이 잦았던 평택의 농성도 이같은 목적으로 축성되었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한편 이 일대에 포구가 발달되어 있어 고려시대 중요한 교통로인 점을 주목하여 농성이 고려시대에는 창고성 역할을 하였을 가능성도 크다.

셋째 조선시대 축성설이다. 임진왜란 때 왜적을 막기 위해 쌓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농성의 축조와 임진왜란을 연결시키는 것은 같으나 그 축조 주체를 전혀 다르게 제기하는 설도 있다. 조선총독부가 간행한 “朝鮮寶物古蹟調査資料”에는 지역 주민의 말을 인용하여 임진왜란때 왜구가 이땅에 농업을 경영하며 土城을 設築하였으며 農城이라는 명칭도 그래서 생겼다는 것이다.

그런데 성의 축성과 관련하여 최근 평택임씨 종친회에서 새로운 설을 제기하고 있다. 즉 唐말기 翰林學士였던 林八及이 참소를 당하여 薛仁敬, 許董, 劉?, 宋奎, 崔?, 權之奇, 孔德狩 등 동료 학사 七인과 함께 신라 말기인 八百년에서 八百五十년 경에 이곳 팽성으로 망명하였으며 이곳에 자리 잡은 林八及이 농성을 축조하여 이를 근거지로 삼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신라 조정에도 등용되었으며 신라 변방을 침공한 賊兵을 토벌하는 등의 공도 세웠다는 것이다. 그리고 彭城이라는 지명의 유래도 林八及과 관련해서 해석하고 있다. 林八及의 고향이 中國 福建省에 있는 彭城인데 林八及이 이곳 농성 일대에 정착한 후 고향의 지명을 그대로 붙여 이곳을 팽성이라고 불렀다는 것이다.

이상과 같은 조사 결과로 볼 때 九세기전후에 중국에서 임팔급을 비롯한 여러 사람이 이곳 농성 또는 그 주변으로 망명하여 정착의 근거지를 정하였다는 문헌은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다고 본다. 또한 농성은 조선시대 팽성현의 객사나 동헌등의 건물이 있었던 지점과는 불과 1㎞밖에 떨어저 있지 않기 때문에 팽성 임씨의 문헌은 상당한 신빙성이 있는 것이다. 그리고 어느 성씨와 관련된 지역의 역사를 정리함으로서 특정유적의 역사적 가치나 의의를 제고시킨다는 차원에서 농성의 역사를 우리 나라에 귀화한 팽성임씨의 발원과 연계시켜 보는 것도 의미있다고 사료된다.

 

발 췌 : 평택시에서 水原大學校에 학술조사 用役을 의뢰한 보고서

 

八及公에서 夢周公까지 系代 調査

 

도시조(都始祖) 팔급(八及)公에서 몽주(夢周)公까지는 단관(單貫)평택(平澤)貫(彭城)으로 내려오다 몽주공의 구미(九美) 아들 대에서 여러 관으로 분관 되였으나 상계의 계대가 되지 않아 정립이 시급한 실정이다

이를 위해서는 중앙회(中央會)에서는 2000년 11월 대전(大田) 뿌리공원에서  2001년 7월에는 예천 '옥천서원(玉川書院)'에서 두 차례의 족보연구 분과위원회 세미나를 통하여 집약된 내용이다.

 

一世     二世     三世    四世     五世     六世    七世

 林八及 ― 良貯 ― ?  ― 禧 ― 冕 ― 得雨 ― 夢周公

 

위 계대(系代)를 고증하는 구보(舊譜) 자료로는

    ① 1829년  기축보(己丑譜)(울진관)

    ② 1871년  임신보(壬申譜) 평택관

    ③ 1874년  林氏 世家 大同譜(林吉相 제공)

    ④ 1899년  林氏 大同 世譜 元編  

    ⑤ 1924년  彭城林氏大同譜(甲子譜)에서는 모두 一世, 二世, 三世 등으로 되어 있거나, 세대(世代) 기록 없이 차례대로 편제(編制)되어 있다.

구미(九美)(아홉 美)의 손(孫) 중 계미공(季美) 系는 순창관조(淳昌貫祖)를 득우(得雨)로, 예천관조(醴泉貫祖)를 몽주(夢周)로, 부안관조(扶安貫祖)를 계미(季美)로 3세대가 위의 구보(舊譜)에 기록되어 있으며 또한 구보 자료에  1874년 林氏 世家 大同譜 卷之一의 八及公 난에 평안도 개천(介川) 묘향산에 세워진 팔급공(八及公)의 묘갈명(墓碣銘)을 증손 충숙공(忠肅公)이 찬(撰)하였다는 자료가 있다. 이것은 충숙공(忠肅公)인 희공(禧公)이 팔급공의 증손자이고, 팔급공이 증조부이며, 양저공(良貯公)이 조부, 무공(?公)이 아버지란 사대(四代)의 계대(系代)를 알 수 있다.

년대(年代) 상으로 검토(檢討)해 보면 팔급공(八及公)의 상대(上代)에 고조부인 온공(蘊公)의 관직 년대가 788년, 종조부인 동공(同公)이 821년에 급제하고 팔급공과 동항(同行)인 상청공(尙淸公)이 866년에 급제하였다는 것을 종합 고찰해 보면 1世代가 평균 25년으로 추정되는데, 근대와 같이 1世代를 평균 30년으로 보는 것과 8?9세기(世紀)와 같이 의술이 발달치 못한 시대의 평균 1세대 연수가 낮은 것도 일리가 있다고 보여진다.

같은 논리로 팔급공(八及公)이 870년경에 동도(東渡)하고 7世인 몽주공(夢周公)까지를 一世代를 평균 25년으로 본다면 서기 1020년이 되고, 1世대를 평균 30년으로 본다면 1050년으로 되는데 몽주공(夢周公)의 관직 년도가 1010~1031년이므로 연대 상으로 보아도 타당성을 인정할 만 하다.

또 한 가지 중요한 논거는 오래된 충정공(忠貞公)(휘 彦脩) 비문(碑文)에 온공(蘊公)을 시조로 충절공(忠節公) 팔급공(八及公)이 태사(太師)공 양저(良貯)를 낳고 양저(良貯)공이 충렬(忠烈)공 무(?)를 낳고 무(?)공이 충숙(忠肅)공 희(禧)를 낳고 희(禧)공이 시중공(侍中公) 면(冕)을 낳고 면(冕)공이 시금위???(侍禁衛) 득우(得雨)를 낳고 득우(得雨)공이 충선공(忠宣公) 몽주(夢周)를 낳다 는 기록은 본 계대(系代)를 확실히 고증하고 있다.

이상 여러 자료를 종합 검토하여 팔급공(八及公)으로부터 몽주공(夢周公)까지의 계대(系代)를 정립(定立)하고 이를 제청한다.

 

표1    韓國林氏 上系資料

 

代數

官 職

諡 號

配 位

墓地

王 代

年代(일부는 推定)

1

八及

翰林學士

吏部尙書

忠節公

貞敬夫人

福州金氏

彭城

新羅 景文

서기 870

2

良貯

太師

上將軍

太師公

貞敬夫人

慶州金氏

善山

新羅 孝恭

900추정

3

?

上將軍

彭城伯

忠烈公

貞敬夫人

開城王氏

平安道

介川

高麗 太祖

927935

(관직기간)

4

門下侍中

忠肅公

貞敬夫人

驪興宋氏

開城

″ 惠宗

950년 추정

5

門下侍中

侍中公

貞敬夫人

草溪鄭氏

開城

″ 定宗

946947

(관직기간)

6

得雨

侍禁衛???

 

貞敬夫人

開城王氏

彭城

″ 光宗

950975

(관직기간)

7

夢周

評察品事

忠宣公

貞敬夫人

開城王氏

牙山

″ 顯宗

10101031

(관직기간)

 

 

◎  上系先祖人物 事蹟

 

一世  八 及 (팔급. 忠節公)

서기 870년 경 중국 복건성(福建城) 동령(東鈴) 팽성(彭城)에서 七學士와 함께 唐나라 말기의 혼란을 피해 지금의 평택시 팽성(彭城)읍에 동도 하셨다. 당나라에서는 18세에 한림학사(翰林學士)로 시작 신라 국에서는 이부상서(吏部尙書)의 높은 벼슬에 이르고 변방 외적의 침입을 막은 큰 공으로 시호(諡號)는 충절공(忠節公)이며 묘소는 팽성읍 안정리에. 배위(配位)는 貞敬夫人 福州 金氏이시다. 묘갈명(墓碣銘)은 증손 충숙공(忠肅公)이 쓰시다.

 

二世 良 貯(양저. 太師公)

신라조에 出仕하여 태사(太師)와 상장군(上將軍) 중랑장(中郞將)에 이르고 경순왕자(敬順王子) 정현(貞顯)의 사위이며 덕이 있는 재상으로 충직의 절개가 높아 경순왕(敬順王)이 고려조에 귀순을 하고자 할 때 군주의 도리가 아니라고 직간하여 왕의 노여움을 사 선산(善山)으로 유배되어 생애를 마치었다 배위는 정경부인 경주 김씨이고 부는 정현(貞顯)이며 묘지는 선산(善山) 야성(野城)에 있다. (註) 正史와 宗史가 一致되지 않는 부분이 있으나 硏究結果가 나오기까지는 從前記錄되로 移記함.

 

三世  ? (무 .忠烈公)

벼슬이 상장군(上將軍)에 이르시고 공이 있어 평택(平澤)君에 봉작하였으며 시호(諡號)는 충렬공(忠烈公). 배위(配位)는 정경부인(貞敬夫人) 開城 王氏이다. 묘지는 平安道 介川 雲岩洞에 있으며 묘갈명(墓碣銘)은 후손 충정공(忠貞公) 언수(彦脩)가 쓰시다.

 

四世  禧 (희 忠肅公)

고려 壁上 三韓 三重 大匡의 관직에 오르고 시호는 충숙공(忠肅公)이다. 배위는 정경부인(貞敬夫人) 여흥(驪興) 송씨(宋氏). 묘지는 開城 南山에 있으며 묘갈명(墓碣銘)은 후손 忠貞公 언수(彦脩)가 쓰시다.

 

五世  冕 (면 侍中公)

문하시중(門下侍中) 상장군(上將軍) 同 평장사(平章事)의 관직에 오르고 배위는 정경부인 평양조씨(平壤趙氏)와 정경부인 초계정씨(草溪鄭氏)이며 묘지는 考位 同原 酉生合(혈)?이다.

 

六世 得雨 (득우)

고려에서 시금위(侍禁衛)의 관직에 오르고 배위(配位)는 정경부인(貞敬夫人) 개성왕씨(開城王氏). 父는 윤(倫)이다. 묘지는 평택시 팽성읍 용주방(龍珠坊)에 배위(配位) 묘는 龍仁 大峙에 있다. 현 순창(淳昌) 林氏 관조(貫祖)이시다.

 

七世  夢周 (몽주. 忠宣公)

고려에서 평찰품사(評察品事)의 관직에 오르고 아우님이 몽정(夢程) 몽상(夢商)이 있으며 九美 즉 自美 秀美 見美 斗美 箕美 允美 伯美 仲美 季美의 아홉 아들을 두고 모두 君으로 봉작(封爵)한 인연으로 많이 분관하였다. 배위는 정경부인(貞敬夫人) 풍천(豊川) 임씨(任氏)이고 묘소는 牙山 九月洞에 시호는 충선공(忠宣公)이시다.

 

출 처 : 임씨 상계 보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