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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씨 가문의 상고사 서문(林氏 家門의 上古史 序文)

득성임씨 120세, 문헌공 30세 임 종 상

 

지구의 나이가 약 46억년이다. 그동안 수많은 생명이 진화 하면서 우리 인류는 4만여년 전 서아프리카에서 출현한 호모 사피엔스 부터 진화해 왔다.

그 후 구석기시대와 신석기시대를 지나며 수렵 생활에서 농경 사회로 발전하며 집단 거주가 시작 되었다. 청동기 시대에 이르러 국가 형태로 발전되었으며 그것은 역사학적인 기록과 유물을 통하여 확인 되고 있다.

최초로 시작된 역사歷史를 상고사上古史라고 한다. 우리나라의 상고사는 기원전 2,333년 단군신화檀君神話로부터 시작되고, 우리 임씨의 상고사上古史는 그보다 400여년 전 삼황오제三皇五帝 부터 시작이 된다.

우리가 신화神話와 역사歷史를 구분하는 것은 고증考證할수 있는 유물과 유적의 유有, 무無에 따라 판단한다. 확인할 근거가 없이 입과 귀를 통해 내려온 구비 역사 문학을 신화라 하는 것이다.

서 아프리카에서 출현한 현생 일류의 조상은 오랜 시간에 걸쳐서 유럽과 중앙아시아를 지나 우랄 알타이어산맥을 따라 몽고와 대륙 등을 통해서 우리나라에 까지 도착하게 된 것이다.

 

신화神話 : 오천여년 전에 삼황三皇이 나라를 다스렸다. 그중 복희(伏羲)씨는 팔쾌를 지어 자연의 법칙을 응용하였으며 생활하는 방법과 가축을 기르는 것을 가르쳤다. 여와씨는 인류의 시조로 불리고 의복과 집을 짓는 방법을 가르쳤다. 또한 염제신농(炎帝神農)씨는 의약, 식물의 재배와 농사짓는 법, 도기를 만드는 방법을 가르치며 나라를 다스렸다고 한다. 이들은 반인 반수로 사람과 짐승의 모습을 한 신(神)으로 여겼다.

삼황三皇시대 이후 오제五帝의 시대가 이어지는데 역사가 사마천의 사기史记는 오제본기五帝本紀 부터 기록되어 있다.

오제五帝의 첫 번째 왕인 황제헌원(黃帝軒轅)은 치우천왕간의 전쟁에서 승리한 후 국가를 세웠고, 2대 왕인 전욱은 황제의 손자이며, 3대왕 제곡은 황제의 증손자이다. 제곡은 자기 아들에게 왕위를 물려주지 않고 훌륭한 인물을 찾아 선양하여 4대 왕에 요堯를, 요임금 역시 인제를 발굴하여 5대 왕 순舜에게 양위했으며 순임금도 신하였던 우禹를 왕으로 추대 했으나 우왕의 아들이 이어받으며 하나라를 세웠다. 이후 하나라는 마지막왕인 걸왕의 폭정으로 부속국가인 은殷나라 탕왕(탕왕은 황제와 제곡의 후손)에게 쫓겨났고 탕왕이 세운 국가가 은殷나라 이다.

 

역사歷史 : 은殷나라(혹은 상나라로 불림) 왕조의 개조開祖인 탕왕(湯王:天乙)은 백성의 요망에 따라 걸왕을 쳐서 멸하고 은 왕조를 세웠다. 은殷나라는 기원전1600년 탕왕부터 기원전 1046년 30대 주왕에 이르기까지 554년간 나라를 통치하였다. 은 왕조의 계도系圖는 한대漢代에 사마천司馬遷이 고대의 계보에 따라 사기史記 은본기殷本紀 속에 기술하고 있다. 19세기 말에 허난성河南省 안양현安陽縣 샤오툰촌小屯村의 은허, 즉 은나라 수도의 유적으로 알려진 장소에서 갑골문자를 새겨 놓은 귀갑龜甲과 우골牛骨이 다량 발견되었다. 최근 학자들의 연구에 따라 갑골문자는 은 왕조의 점술사가 은나라 선조의 제사를 점쳤던 것이었으며, 여기에 나타나는 여러 왕의 이름과 그 세계世系는 사기에서 전하는 은 왕조의 계보와 대체로 일치한다는 것이 명백해졌다. 이 시기에 인류 최초의 문자인 갑골문자를 사용했으며  청동기 화로와 유물들이 대량으로 발견되며 실질적인 세계 최초의 국가로 역사에 기록된 것이다.

은나라 28대 광왕의 아들은 장남이 29대 덕왕이고 차남이 비간이며 삼남이 기자이다.

 

주왕紂王 : 비간의 형 덕왕 (29대왕)에 이어 아들 주紂가 30대 왕위에 올랐다.  비간의 조카인 주왕紂王은 달기라는 궁녀에 빠져 사치와 향락을 즐기며 바른 말로 간하는 신하들을 무참하게 죽였다. 한 때는 '포락'이라는 형벌을 만들었는데, 뜨거운 숯불 구덩이 위에 기름을 칠한 둥근 구리기둥을 걸쳐놓고 그 위를 맨발로 걷게 하는 형벌이다. 이러한 형벌을 받은 신하들은 미끄러운 구리기둥을 걸어가다가 숯불 구덩이에 떨어져 고통스럽게 죽어갔으며 주왕과 달기는 이를 보면서 즐거워 하였다고 한다.  

 

비간比干 :  비간은 주紂왕의 실정에 계속 충언을 하였으나 듣지 않자 마지막으로 목숨을 걸고 3일간 쫒아 다니며 간언을 하였다.  그러자 주왕과 함께 있던 달기가 충신은 심장에 구멍이 아홉개라는 데 확인해 보자며 주왕을 유혹하여 가슴이 쪼개지는 형벌을 받고 죽음을 당했다. 그때 임신 중이던 비간의 정부인 진씨는 장림산長林山으로 피신하여 살다가 아들을 낳았고 천泉이라 이름 지었다.

얼마 후 은나라의 부속국 이었던 주周나라 무왕武王은 태공망(강태공)을 군사로 임명하여 은나라를 정복하고 주나라를 세웠다. 후일 주周나라 무왕武王은 충신이며 현자였던 비간공을 기리며, 그의 아들 천에게 장림산長林山에서 태어났다고 하여 장림산 중 림林자를 따서 임씨林氏라 사성賜姓하였고, 튼튼하게 자랄 것을 뜻하여 견堅자로 이름을 지어 임견林堅으로 호칭하니 바로 이분이 득성시조得姓始祖이시다. 그리고 선친이신 비간공을 태시조太始祖로 모시게 된 것이다. 주나라 때부터 이분을 추앙하기 위하여 비간능比干陵을 위시하여 삼인사三仁祠(비간,기자,미자)등 여러 곳에 영정影幀을 모셔놓고 제향을 올리고 있다.

기자箕子 : 비간의 동생으로 기자는 주왕이 상아 젓가락을 사용하는 것을 보고 그가 장차 더욱 사치와 향락에 빠져 나라를 망칠 것이라고 예견했다. “미미한 것을 보고 앞으로 드러날 것을 안다”는 견미지저 라는 고사성어가 이때 나왔다.  사마천의 사기 (동미자 세가)에서 주 임금이 상아 젓가락을 사용하기 시작하자, 상아 젓가락을 쓰기 시작한 이상 이제 옥잔을 사용할 것이 틀림없고, 옥잔을 쓰면 먼 지방에서 올라온 귀하고 기이한 기물들을 사용하려 들것이다“라며 탄식했다. 가자는 머리를 풀어 헤치고 미친척하며 화를 피해 동쪽 피신하여 기자조선을 세웠다.

 

미자微子 : 주왕의 이복형 미자도 여러 번 충고했지만 듣지 않았다. 이에 미자는 말로 해서는 안 되겠다고 판단하고 자결하려 했으나 당시 태사(太師)와 소사(少師)가  “아비와 자식 사이에는 골육의 정이 있고, 군주와 신하는 의리로 맺어져 있다. 그래서 아비에게 잘못이 있을 때 자식은 세 번을 충고하고도 듣지 않으면 계속 통곡한다. 신하가 세 번을 충고했는데도 듣지 않으면 그 의리상 떠나도 되는 것이다.”라며 미자에게 떠날 것을 권하여  상나라를 떠났다. 당시 많은 충신들은 간언을 듣지 않고 폭정을 계속한 주왕을 떠났고 측근에는 간신들만 남아 결국 주나라에 정복당했다.

천하제일묘(天下第一墓), 천하제일비(天下第一碑)

허난성 신샹(新鄕)시 웨이후이시에 비간의 사당과 무덤이 남아 있다. 사당과 무덤은 역대 왕조로부터 여러 번 중건되었고, 1963년 중국 정부에 의해 전국 중점문물보호단위로 지정되어 잘 관리되고 있다.

비간의 무덤은 거의 최초로 봉분을 갖춘 무덤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이 때문에 ‘천하제일묘(天下第一墓)’라는 명성을 얻었다.

또한 공자가 돌에 칼로 ‘은비간묘(殷比干墓)’라고 새긴 비석이 남아 있는데, 이것이 사실이라면 이 글씨는 공자가 세상에 남긴 유일한 실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이 때문에 이 비석은 ‘천하제일비(天下第一碑)’라는 명성을 얻었다.

매년 탄신일에 성대한 행사가 열리는데, 이때는 전 세계의 임씨 후손들이 참가한다.

 

많은 선조님들이 역사에 큰 공헌을 하였는데, 성인聖人 공자孔子의 72제자 중 한분으로 큰 역할을 하신 득성조 23세인 임방林放공이 계시고 득성조 64세인 진안군왕晋安君王 임록林祿공이 계시다.

또한 득성조 79세인 임피공이 계신데 이분의 아들 9형제 모두 자사刺史를 지내어 9목사九牧史라 칭하고 있다. 그 중 6번째 아들이 임온공 이시다. 득성조 80세인 임온공은  서하임춘 조부님의 서하문집 가운데 수록되어 있는 중추회음서中秋會飮序 중에 “금년중추 하루 전날 이담지가 나에게 글을 보내와 하는 말이, 오늘 저녘에 술을 갖추어 명월아래 잔을 주고 받으며 우리집 고사를 다시 닦아볼까 하는데 자네도 제남濟南(임온의호)의 후손이 아니던가 어찌 옛정을 잊을수 있겠나” 한 것으로 미루어 임온의 현손인 임팔급께서 당나라에서 우리나라로 동도 하셨다는 단서가 되었다. 현손 중에는 강과 바다를 지키는 신선 마조 임묵랑이 있으며, 고손高孫 임팔급 八及공께서 당나라 말 한림학사병부시랑翰林學士兵部侍郞의 벼슬을 하던 중 조정이 극심한 혼란기를 맞아 동료 7학사學士와 함께 고향 당나라의 팽성에서 배를 타고 당시 통일신라의 아산만 상류로 동도東渡하여 현재의 평택시 팽성읍에 정착하시니 이분이 우리나라 林氏의 시조가 되었다.

 

현재 우리나라 임林씨 모두는 황제, 제곡의 후손이며 세계 최초의 국가인 은나라 왕족의 후손이다.  태시조 이신 비간공과 득성 시조이신 임견공을 비롯한 많은 훌륭한 조상의 후손이다. 우리는 이러한 조상과 뿌리 깊은 역사와 전통을 가진 명문 가문의 일원이다. 우리 가문의 뿌리는 인류의 문명과 함께 시작 되었고, 우리 가문의 전통과 문화는 인류 역사의 중심에서 함께 발전 되어 왔다. 우리는 이러한 자부심과 명예를 가지고 계속 발전하고 선양하여 우리의 역사와 혈통을 후손들에게 이어주는 징검다리 역할을 뿌리 깊은 가문의 사명의식으로 이어 나가야 할 것이다.

 

참고 : 사기(史記) 은본기(殷本紀), 「주본기(周本紀)」, 「송미자세가(宋微子世家)」

• 『상서(尙書)』

• 『시경(詩經)』

• 『논어(論語)』

 

은殷 나라 (고대의 왕조 BC1600~BC 1046)

 

수도의 이름을 따라 상(商)이라고도 한다. 하(夏)·은(殷)·주(周) 3대의 왕조가 잇달아 고대 중국 본토를 지배하였다고 하나, 하왕조는 고전(古典)에만 기록되어 있을 뿐, 전설적인 존재에 불과하다. 이에 대하여 은왕조는 20세기에 들어서 그 수도에 해당하는 은허(殷墟)의 발굴이 진행됨에 따라서, 적어도 그 후기에는 당시의 문화세계였던 화북(華北)에 군림하였던 실재의 왕조였음이 판명되었다. 따라서 은나라는 중국 최고(最古)의 역사적 왕조라 할 수 있다. 은나라 전기는 BC1600년부터 BC1300년까지이고, 도읍을 은으로 바꾼 은나라 후기는 BC1300년부터 BC1046년까지이다.  성립과 계보 : 전설에 따르면 하왕조는 나라 전토를 휩쓸었던 대홍수를 잘 다스렸고, 전국을 9개 주(州)로 나누어 지방 통치 조직을 완성한 우(禹)의 자손을 왕으로 섬겼다. 그로부터 17대째가 되는 걸왕(桀王)은 전제정치로 인하여 중국 백성의 지지를 잃었다. 은 왕조의 개조(開祖)인 탕왕(湯王:天乙)은 백성의 요망에 따라 걸왕을 쳐서 멸하고 은왕조를 창건하였다고 한다.

 

은나라는 개조 탕왕으로 부터 30대 주왕까지 554년간 나라를 통치하였다. 은나라 왕조의 계도(系圖)는 한대(漢代)에 사마천(司馬遷)이 고대의 계보에 따라 《사기(史記)》〈은보기(殷本紀)〉속에 기술하고 있다. 19세기 말에 허난성[河南省] 안양현[安陽縣] 샤오툰촌[小屯村]의 은허, 즉 은나라 수도의 유적으로 알려진 장소에서 갑골문자를 새겨 놓은 귀갑(龜甲)과 우골(牛骨)이 다량 발견되었다. 최근 학자들의 연구에 따라 갑골문자는 은왕조의 점술사가 은나라 선조의 제사를 점쳤던 것이었으며, 여기에 나타나는 여러 왕의 이름과 그 세계(世系)는 《사기》에 전하는 은왕조의 계보와 대체로 일치한다는 것이 명백하다

 

참고 : 사기(史記) 은본기(殷本紀), 주본기(周本紀)

 

  은나라 역대 왕 계보(은나라 역대 임금)

 

대수

묘호

시호

성명

사기

갑골문자

재위기간

1

태조(太祖)

태무왕

(太武王)

자리(子履)

()

, 대을

(, 大乙)

기원전 1600~ 기원전 1589

2

 

애왕(哀王)

자승(子勝)

외병(外丙)

복병(卜丙)

기원전 1588~ 기원전 1587

3

 

의왕(懿王)

자용(子庸)

중임(仲壬)

 

기원전 1586~ 기원전 1583

4

태종(太宗)

문왕(文王)

자지(子至)

태갑(太甲)

대갑(大甲)

기원전 1582~ 기원전 1571

5

 

소왕(昭王)

자순(子絢)

옥정(沃丁)

 

기원전 1570~ 기원전 1542

6

 

선왕)(宣王)

자변(子辯)

태경(太庚)

대경(大庚)

기원전 1541~ 기원전 1517

7

 

경왕(敬王)

자고(子高)

소갑(小甲)

 

기원전 1516~ 기원전 1500

8

 

원왕(元王)

자밀(子密)

옹기(雍己)

 

기원전 1499~ 기원전 1487

9

중종(中宗)

경왕(景王)

자주(子伷)

태무(太戊)

대무(大戊)

기원전 1486~ 기원전 1422

10

 

효성왕

(孝成王)

자장(子莊)

중정(中丁)

중정(中丁)

기원전 1421~ 기원전 1401

11

 

사왕(思王)

자발(子發)

외임(外壬)

복임(卜壬)

기원전 1400~ 기원전 1386

12

 

전평왕

(前平王)

자정(子整)

하단갑

(河亶甲)

전갑(戔甲)

기원전 1385~ 기원전 1377

13

 

목왕(穆王)

자등(子滕)

조을(祖乙)

차을(且乙)

기원전 1376~ 기원전 1358

14

 

환왕(桓王)

자단(子旦)

조신(祖辛)

차신(且辛)

기원전 1357~ 기원전 1342

15

 

희왕(僖王)

자유(子踰)

옥갑(沃甲)

강갑(羌甲)

기원전 1341~ 기원전 1337

16

 

장왕(莊王)

자신(子新)

조정(祖丁)

차정(且丁)

기원전 1336~ 기원전 1328

17

 

경왕(頃王)

자경(子更)

남경(南庚)

 

기원전 1327~ 기원전 1322

18

 

도왕(悼王)

자화(子和)

양갑(陽甲)

상갑(象甲)

기원전 1321~ 기원전 1315

19

세조(世祖)

문성왕

(文成王)

자순(子旬)

반경(盤庚)

반경(般庚)

기원전 1314~ 기원전 1287

20

 

장왕(章王)

자송(子頌)

소신(小辛)

 

기원전 1286~ 기원전 1252

21

 

혜왕(惠王)

자렴(子斂)

소을(小乙)

 

기원전 1251

22

고종(高宗)

양왕(襄王)

자소(子昭)

무정(武丁)

 

기원전 1250~ 기원전 1192

23

 

후평왕

(後平王)

자약(子躍)

조경(祖庚)

차경(且庚)

기원전 1191~ 기원전 1148

24

세종(世宗)

정왕(定王)

자재(子載)

조갑(祖甲)

차갑(且甲)

기원전 1148

25

갑종(甲宗)

공왕(共王)

자선(子先)

늠신(廪辛)

 

기원전 1148

26

강조(康祖)

안왕(安王)

자효(子囂)

경정(庚丁)

강정(康丁)

기원전 1148

27

무조(武祖)

열왕(烈王)

자구(子瞿)

무을(武乙)

 

기원전 1147~ 기원전 1113

28

 

광왕(匡王)

자탁(子托)

태정(太丁)

문정(文丁)

기원전 1112~ 기원전 1102

29

 

덕왕(德王)

자선(子羡)

제을(帝乙)

 

기원전 1101~ 기원전 1076

30

 

주왕(紂王)

자수(子受)

제신(帝辛)

 

기원전 1075~ 기원전 1046

 

 

 

 

은허 발굴지에 신축하여 출토품을 보관한 은허박물관

은허 출토품은 이곳과 정주의 하남성 박물관에 나누어 보관되어 있다.

 

주왕  纣王

 

본명 : 자수(子受)

호 : 제신(帝辛)

시대 : 은나라

재위기간 : B.C. 1075년 ~ B.C. 1046년

 

은나라의 마지막 군주. 성(姓) 자(子). 이름 수(受). 호 제신(帝辛). 하상주단대공정(夏商周断代工程)에서는 기원전 1075~1046년간 재위(在位)에 있었으며 제을(帝乙)의 아들로 장자(长子)인 미자계(微子啟)의 모친(母親)의 지위가 비천하여 후계로 지명 받지 못하고 작은아들 제신(帝辛)의 모친이 정실(正室)이 되어 제신(帝辛)에게 후사가 넘겨져 제을(帝乙)의 사후 왕위를 계승하여 상(商)의 마지막 국왕이 되었다. 이복형으로 미자계(微子啓)와 미중연(微仲衍)이 있었고 숙부로는 비간(比干)과 기자(箕子)가 있었다.  사기史记 하본기(史记·殷本紀)에는 재위 초기에는 제신(帝辛)이 용모가 뛰어나고 재능이 우수하였으며 손으로 맹수를 잡을 정도로 힘이 세었고 또한 언변이 뛰어나 논쟁에서 자기의 과실을 감출 수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만년에 들어 음주와 쾌락을 즐겨하였고 애첩 달기妲己를 총애하여 주지육림(酒池肉林)을 만들었으며, 학정을 그치도록 간언하는 신하들로 하여금 기름을 발라 숯불 위에 걸쳐 놓은 구리기둥 위를 걷게 하여 미끄러져서 타 죽게 되는 포락(炮烙)이라는 잔혹한 형벌을 만들고 이를 즐겼다고 전하며 숙부 비간(比干)의 살해와 서백후(西伯侯) 주(周)의 문왕 희창(姬昌)을 7년간이나 유배 시키는 등 충신과 의사(义士)를 박해하였다.  주(纣)는 오랫동안 폭군(暴君)으로, 하(夏)의 걸(桀)과 같이 회자되고 있으나 이러한 역사는 후인(後人)이 첨가한 환상적 요소에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은나라 말기 주왕(纣王)은  도성인 조가朝歌로 부터 70리 밖의 목야지전牧野之战에서 제후들과 연합한 주(周)의 문왕의 아들 주 무왕(周武王)에게 대패하였다.

 

주왕(纣王)은 조가(朝歌)로 도주하여 7년에 걸쳐 건축한 호화궁전 녹대(鹿台)에 올라 불속에 뛰어들어 자살하였고 이로 인해 은나라는 멸망하였다.

 

참고문헌

주왕[纣王] (중국행정구획총람).  사기史记 하본기(史记·殷本紀)

 

비간 比干

 

시대 : 고대 상(商, 은)나라

출생 - 사망 : BC.1125년 ~ BC.1063년

관련 용어 : 시간(尸諫)

 

은(상)나라 말기 3명의 현자 중 한 명 은나라의 충신     

 

주왕의 숙부

말읍沫邑, 지금의 허난성 치현(淇縣))에서 태어났으며, 성은 자(子)이다. 상(은)나라 28대왕 제정(帝丁)의 차남이고, 29대왕 제을의 아우이자 제신 즉 30대왕인 주왕의 숙부이다. 20세에 태사(太師, 황제의 스승)가 되어 상나라 왕 제을을 보좌했고, 어린 제신을 돌봤다.

 

주왕이 즉위한 후 폭정을 일삼자 소사(少師, 훗날의 승상)였던 비간은 이를 비판하고 직언을 했다. 결국 주왕은 “성인의 가슴에는 구멍이 아홉곱 개 있다고 하던데 어디 한번 열어보자.”라며 비간의 심장을 들어내 죽였다.

 

비간의 부인은 임신 3개월째에 남편이 화를 당하자 그 화가 자신과 태아에게도 미칠까봐 수도였던 조가(朝歌, 말읍, 지금의 허난성 치현)를 떠났다. 이윽고 장림(長林, 지금의 허난성 웨이후이(衛輝)시)의 한 석실에 숨어 아들을 낳았는데 이름을 천(泉)이라 했다. 무왕이 주왕을 토벌하여 천하를 평정한 다음 비간의 후손을 수소문했는데, 마침내 비간의 아들이 장림에서 태어났다는 것을 알고는 임씨 성을 내리고 이름을 견으로 바꾸었다고 한다. 그러고는 지금의 허베이성 안핑(安平)현에 해당하는 박릉(博陵) 지역을 봉지로 주었다고 한다.

 

충직과 직간의 대명사

비간은 기자, 미자와 함께 ‘은말삼인(三仁)’ 또는 삼현(三賢)으로 불리며 대대로 추앙을 받았다. 역대 왕조에서도 많은 관심과 추앙을 받았다. 충직과 직간(直諫)의 대명사로, 바른 말을 한다는 ‘시간(尸諫)’이란 단어가 여기서 나왔다.

 

소설 속의 비간

명나라 때의 유명한 소설가 허중림許仲林의 대표작 『봉신연의』에 비간이 등장하는데, 소설 속에서 비간은 호리동(狐狸洞, 여우굴)을 불태우는 바람에 구미호에 비유된 달기(주왕의 애첩)의 원한을 사서 주왕에 의해 심장이 갈라지는 형벌을 받는다. 이후 강태공이 신으로 봉해질 때 문곡성에 봉해진다.

 

관련 유적

허난성 신샹(新鄕)시 웨이후이시에 비간의 사당과 무덤이 남아 있다. 사당과 무덤은 역대로 여러 번 중건되었고, 1963년 중국 정부에 의해 전국 중점문물보호단위로 지정되어 잘 관리되고 있다.

비간의 무덤은 거의 최초로 봉분을 갖춘 무덤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이 때문에 ‘천하제일묘(天下第一墓)’라는 명성을 얻었다. 또한 공자가 돌에 칼로 ‘은비간묘(殷比干墓)’라고 새긴 비석이 남아 있는데, 이것이 사실이라면 이 글씨는 공자가 세상에 남긴 유일한 실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이 때문에 이 비석은 ‘천하제일비’라는 명성을 얻었다.

매년 탄신일에 성대한 행사가 열리는데, 이때는 전 세계의 임씨 후예들이 참가한다.  제향 참례 및 조상 순례를 인도하여 춘추春秋로 다녀올 수 있었다. 춘계제향春季祭享은 하남성 위휘시河南省 衛輝市의 태시조 비간릉比干陵에서 행사 하였는데 대규모의 태시조 릉과 많은 사당, 제청이 있었으며, 여기에는 비간공을 비롯하여 이분의 비碑 와 적자 득성 원조 임견공과 손자 두분의 상像을 배향하여 모셔 놓았고 오래된 수많은 비석과 넓은 광장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행사에 참여한 각 국의 종친 대표들이 각 나라 이름이 적힌 푯말을 들고 질서있게 입장하여 제향 참배를 하게 되니 3천 백여년이 지난 지금도 조상이 얼이 새로웠다. 특히 중국 정부기관에서 우리 일행을 특별히 보살피기를 호텔에서부터 호위가 삼엄하였고 차편으로 갈 때는 앞뒤로 경찰이 에스코트를, 연도沿道에는 교통경찰이 거수경례를, 행사장에는 당비서. 시장. 서장 등 관리들이 환영하였으며 악대까지 동원하여 환영하는 것이 퍽 인상적이었다.

 

참고문헌

• 『사기(史記)』 「은본기(殷本紀)」, 「주본기(周本記)」

• 『봉신연의(封神演義)』

 

(태시조 은태사 비간공 초상화)

 

( 공자가 돌에 칼로 ‘은비간묘(殷比干墓)’라고 새긴 비석)

 

태시조 비간공 초상화

 

 

 

 

 

 

 

 

 

 

기자 箕子

은(상)나라 말기 3명의 현자 중 한 명

 

시대 :  고대 상(은)나라

출생 - 사망 : 상(은)나라 말기 ~ 주나라 초기로 추정

관련 고사성어 : 견미지저(見微知著), 홍범구주(洪範九疇)

 

은말 삼인 중 한 명

본명은 서여(胥余)이며, 상나라 28대왕 문정(태정)의 아들이자 29대왕 제을의 아우, 상나라 마지막 왕 주의 숙부이다.

기자는 기(箕, 지금의 허난성 서화(西華)현) 지방의 땅을 봉지로 받았고, 작위가 자(子)이기 때문에 기자(箕子)라고 일컫는다. 벼슬은 태사(太師, 황제의 스승)를 지냈으며 상(은)나라의 운이 다하자 조선으로 가서 동방군자국(東方君子國)을 건립하였는데, 그 유풍이 지금까지 전해진다.

기자는 미자, 비간과 더불어 ‘은말삼인(殷末三仁)’으로 불린다.

 

시대상황

상주혁명

상의 마지막 임금 주는 힘과 총명함을 동시에 갖춘 대단한 통치자였다. 하지만 자만심이 너무 강하여 나라를 독단적으로 통치하고 주색을 지나치게 밝히는 등 백성들로부터 많은 원성을 샀다. 주왕의 숙부였던 비간은 “군주가 과실이 있는데도 죽을힘을 다해 직언하지 않는다면, 백성들에게만 죄가 있다는 말밖에 더 되겠느냐?”며 주왕에게 달려가 직언했다. 주왕은 크게 성을 내며 “성인의 심장에는 구멍이 일곱 개나 된다던데 정말 그럴까?”라며 비간을 죽여 심장을 갈랐다.

주왕의 배다른 형이었던 미자는 이런 동생의 모습에 놀라 태사(太師) · 소사(小師) 등과 함께 제기(祭器, 제사에 쓰이는 각종 물품)를 들고 주(周)나라로 도망쳐버렸다. 주나라의 무왕은 이런 상나라 내부 상황을 속속들이 파악하고는 군대를 일으켜 일거에 주왕을 물리쳤고, 주왕은 타오르는 불길에 뛰어들어 자살했다. 이로써 상나라가 망하고 주나라가 들어서는 전격적인 정권교체(상주혁명)가 이루어졌다.

 

기자의 견미지저(見微知著)

상나라가 점점 멸망으로 치닫고 있다는 것을 진작에 감지한 사람이 있었는데, 바로 주왕의 숙부였던 기자였다. 기자는 주왕이 상아 젓가락을 사용하는 것을 보고 그가 장차 더욱더 사치와 향락에 빠져 나라를 망칠 것이라고 예견했다. 여기서 ‘미미한 것을 보고 앞으로 드러날 것을 안다’는 ‘견미지저’라는 고사성어가 나왔다.

사마천은 『사기』 「송미자세가」에서 이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주 임금이 상아 젓가락을 사용하기 시작하자 기자는 ‘상아 젓가락을 쓰기 시작한 이상 이제 옥잔을 사용할 것이 틀림없고, 옥잔을 쓰면 곧 먼 지방에서 올라온 귀하고 기이한 기물들을 사용하려 들 것이다. 앞으로 수레와 말 그리고 궁실의 사치스러움도 이렇게 시작되어 진정시킬 수 없을 것이다’라며 탄식했다.”

 

기자조선 건국

기자의 예견대로 주왕은 날이 갈수록 음탕한 생활에 빠졌다. 기자가 충고했으나 듣지 않았다. 주위에서는 기자에게 차라리 떠나는 것이 낫지 않겠냐고 했으나 기자는 “신하된 자가 자신의 충고를 듣지 않는다 하여 떠나버리는 것은 군주의 잘못을 부추기는 꼴이 되고, 나 자신도 백성들의 기쁨을 뺏게 되니 차마 그럴 수 없다”며 머리를 풀어헤치고 미친 척하다가 잡혀서 노예가 되었다.

미친 척하다가 감옥에 갇혀서 화를 피한 기자는 훗날 주 무왕이 은나라를 정벌하여 멸망시키고 주나라를 건국한 다음에야 감옥에서 석방되었다. 무왕이 기자를 조선에 봉하고 그에게 통치의 이치를 묻자, 기자는 홍범구주로 통치의 요체를 설파했는데 이것이 『상서』 「홍범(洪範)」 편이라고 한다.

한편, 기자는 망국의 한을 담은 <맥수가(麥秀歌)>를 지었다고 전한다.

기자가 조선에 봉해졌다는 기록 때문에 기자조선의 실체에 관해 오랫동안 논쟁이 끊이지 않았고, 이 문제는 아직도 진행형이다. 특히 일본 식민사학에 의해 기자조선이 철저하게 부정됨으로써 고조선 연구의 한 고리를 잃은 측면도 있어, 향후 이 문제에 관한 논의가 어떻게 진행되느냐에 따라 고조선 문제에 대한 논의도 달라질 것으로 보인다.   

 

관련 유적

중국 내에 기자와 관련한 유적지가 몇 군데 전해오기는 하지만 특별한 것은 없다. 평양에 기자의 무덤이 남아 있다는 기록이 『고려사』 등에 있는데, 고려 때부터 나타난 기자 숭배에 따른 것으로 본다. 지금은 전해지지 않는다.

기자의 채색상‘은말삼인’의 한 사람인 비간을 기념하는 허난성 치현(淇縣)의 삼현사(三賢祠)에 모셔져 있다.

 

참고문헌

• 『사기(史記)』 「송미자세가(宋微子世家)」, 「은본기(殷本紀)」

• 『상서(尙書)』 「홍범(洪範)」

• 『논어(論語)』

• 『성찰』, 김영수, 위즈덤하우스, 2010.

 

미자 微子

은(상)나라 말기 3명의 현자 중 한 명

송나라 제1대 군주

 

시대 : 고대 상(은)나라~주나라

출생-사망 : 미상

 

은(상)말 삼인(殷末三仁)

미자는 성이 자(子)이고, 이름을 계(啓)라 했는데, 당시 사람들은 미자를 ‘미자계(微子啟)’라고 불렀다. 『사기』 「송미자세가」에는 개(開)로 나오는데 이는 한나라 경제의 이름이 유계여서 그 이름자인 계를 피한 것이다.

은(상)나라 말기 3명의 현자를 뜻하는 ‘은말삼인’ 중의 한 사람이다.

미자는 상나라 왕 제을(帝乙)의 큰아들이자 마지막 왕 주의 배다른 형이다.

주가 임금으로 즉위하여 포악한 정치를 일삼자 미자가 여러 번 충고했지만 주는 듣지 않았다. 이에 미자는 말로 해서는 안 되겠다고 판단하고 자결하려 했으나 그러지 못하고 상나라를 떠났다. 당시 미자는 “아비와 자식 사이에는 골육의 정이 있고, 군주와 신하는 의리로 맺어져 있다. 그래서 아비에게 잘못이 있을 때 자식은 세 번을 충고하고도 듣지 않으면 계속 통곡한다. 신하가 세 번을 충고했는데도 듣지 않으면 그 의리상 떠나도 되는 것이다.”라 했다. 당시 태사(太師)와 소사(少師)도 미자에게 떠날 것을 권했다.

은말삼인 중의 한 사람인 비간은 직언을 하다가 가슴이 쪼개지는 형벌을 받고 죽었으며, 또 한 사람 기자는 미친 척하다가 감옥에 갇혔다고 한다.

[ 주周 무왕 휘하로 들어가다 ]

주 무왕이 주왕을 토벌하고 상나라를 멸망시키자 미자는 바로 제기(祭器)를 들고 군문(軍門)으로 가서, 웃통을 벗고 등 뒤로 손을 묶은 다음 (사람을 시켜) 왼편으로는 양을 끌고 오른편으로는 소꼬리를 장식한 깃발을 쥐게 하고는 무릎으로 기어 앞으로 나와 무왕에게 아뢰었다. 이에 무왕은 미자를 석방하고 전과 같이 관직을 회복시켰다.

무왕은 주왕의 아들 무경(녹보)으로 하여금 상나라의 제사를 잇게 하고, 자신의 동생 관숙과 채숙을 시켜 그를 돕게 했다.

 

제후국 송(宋)의 건국

무왕이 세상을 떠난 후에 어린 성왕이 즉위했으나 무왕의 동생인 주공 단(旦)이 조카 대신 나라의 정치를 대행했다. 관숙과 채숙이 주공에게 의심을 품고 무경(녹보)과 함께 난을 일으켜 성왕과 주공을 습격하려 했는데, 이것이 삼감의 난이다.

주공은 성왕의 명을 받아 무경을 베고 관숙을 죽였고 채숙은 내쫓았다. 이어 미자를 상의 후손으로 대체하여 선조의 제사를 받들도록 하고 <미자지명(微子之命)>을 지어 알린 다음 송에 나라를 세우게 했다.

미자가 원래 어질고 유능했기에 무경을 대신할 만 했고, 상나라의 유민들도 그를 매우 사랑했다. 미자가 죽고 동생 연(衍)이 자리에 오르니 이가 미중이다.

사마천은 미자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무경이 죽자 주 왕실은 미자를 송에 봉했다. 이후 양공이 홍(泓)에서 초(楚)와 싸우다 부상을 입고 패했지만 의리라는 명분을 앞세운 덕에 군자라는 칭송을 얻기도 했다. 경공(景公, ?~BC.453)이 겸양의 덕을 쌓으니 좋지 않은 징조인 화성이 이윽고 자리를 바꾸어 물러났다. 그러나 경공은 천성이 포악하여 마침내 멸망했다.

미자가 태사에게 가르침을 청한 뒤 떠난 일을 칭찬하는 의미에서「송세가」를 지었다.”

 

관련 유적

미자와 관련된 유적으로는 허난성 상추(商丘)시 쑤이양(睢陽)구에 위치한 미자의 사당 미자사(微子祠)가 대표적이다. 이 사당은 1950년초에 훼손되었다고 한다. 청나라 강희제 때 중수비가 남아 있다.

 

참고문헌

• 『사기(史記)』 「은본기(殷本紀)」, 「주본기(周本紀)」, 「송미자세가(宋微子世家)」

• 『상서(尙書)』

• 『시경(詩經)』

• 『논어(論語)』

 

득성 임씨 제 1세 견공

 

선친이신 비간은 주왕의 실정에 계속 충언을 하였으나 듣지 않자 마지막으로 목숨을 걸고 3일간 쫒아 다니며 간언을 하였다.  그러자 주왕과 함께 있던 달기가 충신은 심장에 구멍이 아홉 개 라는데 확인해 보자며 주왕을 유혹하여 가슴이 쪼개지는 형벌을 받고 죽음을 당했다. 그때 임신 중이던 비간의 정부인 진씨는 장림산長林山으로 피신하여 살다가 아들을 낳았고 천이라 이름 지었다.

얼마 후 은나라의 부속국 이었던 주周나라 무왕武王은 태공망(강태공)을 군사로 임명하여 은나라를 정복하고 주나라를 세웠다.  후일 주周나라 무왕武王은 충신이며 현자였던 비간공의 아들에게 임천이 장림산長林山에서 태어났다고 하여 장림산 중 림林자를 따서 임씨林氏라 사성賜姓하였고, 튼튼하게 자랄 것을 뜻하여 견堅자로 이름을 지어 임견林堅으로 호칭하니 바로 이분이 득성시조得姓始祖이시다.

전 세계 임씨는 황제 헌원의 후손이며 오제 중 제곡의 후손으로 은나라 제왕의 후예가 되는데 산서성 서하와 하남성 안양현의 은허에서 대대로 살았고 득성 임씨 시조 견공이 대부에 임명되시자 하나라 기주인 현재의 산사성 이고 옛날에는 서하군을 두었으니 임씨의 조상님들이 바로 서하당의 시초이시다.

 

서하당

우리 세계 임씨의 시조 견공의 후예들이 대대로 대부를 하여 드디어 좋은 문벌을 이루고 목사와 방백공경과 선비인 목, 백, 경, 사로 대대로 인물이 끊어지지 않았다.

득성 임씨 제1세 견공은 재와 차를 낳으셨다.